기존질병이 직무과중으로 악화…업무상 재해

고혈압 콜센터 노동자 근무기간 전체 업무 포함해 업무상 재해 판단 

 

질병과 부상 그리고 사망과 같은 사고가 업무와 연관해 발생한 산업재해에 해당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산재보험법은 단순하게 업무상 사고와 질병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일터에서 다양하게 발생하는 노동자의 질병과 사고, 사망이 구체적으로 업무상 질병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시행령으로 판단 기준을 넘겼다. 그 시행령은 다시 고용노동부의 고시 ‘뇌혈관 질병 또는 심장 질병 및 근골격계 질병의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 결정에 필요한 사항’(2022. 4.28. 고용노동부 고시 제2022-40호)를 통해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상병 노동자의 정상적인 뇌혈관이나 심장혈관의 기능에 뚜렷한 영향을 주는 요인에는 ‘육체적·정신적 과로’가 있다. ‘만성적인 과중한 업무’도 뇌혈관과 심장혈관에 영향을 주는 육체적·정신적 부담에 해당한다. 고용노동부 고시는 업무시간이 얼마나 과해야 육체적·정신적 과로인지, 뇌혈관 등에 영향을 주는 만성적인 과중한 업무상 부담은 어느 정도가 돼야 하는지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에는 일터에서 일하다 노동자가 뇌혈관계 질환이나 심장 질병을 얻은 경우, 기존에 고혈압과 같은 질병이 있었다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되기 어려웠다. 고혈압과 같은 기초질병이나 질환에도 정상적인 근무가 가능한 경우가 있는데, 장시간 근로 등 업무과중 요인으로 고혈압이 악화돼 노동자가 질병에 걸리거나 사망한 경우 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기준이 까다로웠던 탓이다.

또한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고용노동부가 만성과로나 업무상 부담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근로시간을 너무 기계적으로 적용해 온 점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기존 고시에 따르면, 12주 연속 52시간을 초과해야 만성적 과로라고 정하고 있는데, 노동자 개인의 건강 특성에 따라 12주 연속 52시간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여러 사정을 고려해 만성적 과로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대법원은 여러 사업장을 옮겨 다니며 근무하던 콜센터 노동자의 ‘뇌기저핵출혈’이라는 질병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는 판결(대법원 2022두47391. 선고일 2023. 4.13.)을 내놨다.

재판부는 평소 고혈압의 기초질환이 있었던 원고 노동자의 상병에 대해 “평소 정상적 근무가 가능한 기초질병이나 기존질병이 직무의 과중 등이 원인이 되어 자연적인 진행속도 이상으로 급격하게 악화된 때”에 해당한다며,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원고 노동자가 여러 개의 사업장을 옮겨 다니며 상담 노동자로 근무했던 사정에 대해서도 “‘콜센터 상담원’으로 근무한 전체 기간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포함시켜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단하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재판부는 원고 노동자의 사업장에서 업무시간내 휴게시간 등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근무강도와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 발생으로 노동자의 질병과 업무 연관성을 판단하라고 했다. 뇌혈관계 질병의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를 판단할 경우, 고용노동부 고시가 제시하는 업무시간을 절대적 판단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읽힌다.

사건의 경위=콜센터 상담원인 원고는 2018년 2월7일부터 7개월 간 콜센터 시스템 대행업체와 파견고용관계를 맺고, 전국 600개 가맹업체의 무인주차 정산기 사용방법과 주차요금 정산을 안내하고, 무인주차와 관련된 A/S 접수 등을 담당하는 업무를 수행한 노동자다.

원고는 다른 콜센터 사업장에서 4년2개월간 근무 후, 이 사건 콜센터 사업장으로 이직해 7개월 동안 근무하다가 근로시간 중 식사시간에 쓰러져 ‘뇌기저핵출혈’ 판정을 받았다. 피고 근로복지공단은 원고에게 약 2년 전부터 고혈압 증상이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요양불승인결정을 했고, 원고는 그 취소를 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 원심(서울고등법원 2022. 6.9. 선고 2021누69969 판결)은 “콜센터 사업장에서의 업무로 인해 원고에게 이 사건 상병이 발생하였다거나 평소에 정상적인 근무가 가능한 기초질병이나 기존질병이 자연적인 진행속도 이상으로 급격하게 악화되었다고 추단할 수 없어, 이 사건 상병과 원고의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사건의 쟁점과 대법원의 판단=대법원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여러 사업장을 옮겨 다니며 근무하다가 질병을 얻은 경우에 ‘업무상 재해’ 판단 시 고려해야 할 업무의 범위에 있어서 “‘콜센터 상담원’으로 근무한 전체 기간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포함시켜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단하여야 한다”고 설시했다.

앞서 여러 사업장에서 근로를 제공한 상병 노동자의 업무상 재해 판단시 고려해야 할 업무 범위에 대해 이미 대법원의 판례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적용 대상인 근로자가 여러 개의 사업장을 옮겨 다니며 근무하다가 질병에 걸린 경우, 당해 질병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근로자가 복수의 사용자 아래에서 경험한 모든 업무를 포함시켜 판단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대법원 2010. 1.28. 선고 2009두5794 판결, 대법원 2017. 4.28. 선고 2016두56134 판결 등 참조)고 판결한 바 있다.

원심은 원고 노동자에 대한 이 사건 사업장 근무기간과 그 직전인 2년 동안의 일반건강검진 결과만을 주된 근거로 해 제시된 의학적 소견을 전제로 업무상 질병 여부를 판단했다. 재판부는 원심의 판단을 “미흡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재판부는 근무형태·업무내용·휴게시간·휴게장소·근무시간 등에 비춰 이 사건 콜센터 사업장에서의 근무강도와 이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가 질병의 주된 발생 원인에 겹쳐 질병을 악화시켰다면 인과관계를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원고 노동자가 종전 사업장에서 1개 업체 업무를 주로 담당한 반면 이 사건 사업장에서는 전국에 있는 약 600개의 가맹업체 무인주차장 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3교대 근무 중 ‘석간조’로 ‘주간조’나 ‘야간조’ 비해 업무 부담이 높았던 점, 이 사건 사업장의 악성 민원과 관련해 상급자에게 인계하도록 정한 민원응대 매뉴얼이 지켜지지 않아 원고가 직접 이를 응대해야 했던 점을 지적하며, “원고의 직무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봤다.

또한 재판부는 이 사건 콜센터 사업장의 근무환경이 근로기준법 등 관련 규정이 준수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적법한 근무환경에 비해 과도한 수준의 육체적·정신적 피해와 스트레스를 유발한 것으로 보이는 점을 지적했다.

실제 원고의 근로시간은 1일 휴게시간 1시간을 포함 9시간이지만,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이 정한 휴게시설이 마련되지 못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사업장에서 원고 채용시 원고의 건강진단 결과를 참고해 적절한 업무 배치 및 직무스트레스 요인 및 건강문제 발생가능성에 대비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근무환경은 단순히 ‘근로기준법’ 등 관련 규정이 준수되지 못하였다는 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고의 근무 강도를 가중시켜 이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피로 및 스트레스가 적법한 근무환경에 비해 과도한 수준에 이르게 하였음을 의미한다”고 질병과 업무의 연관성을 인정했다.

판결의 의의=이번 판결에서 재판부가 사용자의 감정노동자 보호조치를 담은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의 입법 취지를 근거로 해당 법령의 미비 당시 근로를 제공했던 원고의 질병에 대해 업무연관성을 인정한 점은 획기적이다. 고객응대 근로자에 대한 법령 규정 및 제도적 장치와 이에 따른 사용자의 보호조치가 완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고객응대 근로를 제공했던 원고에 대해 재판부는 이러한 근로환경 역시 원고의 근무강도를 가중시킴은 물론 과도한 육체적·정신적 피로 및 스트레스 등에 노출되게 한 주요한 정황으로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기계적으로 고용노동부 고시에 매몰돼 업무와 질병과의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살피지 못한 현행 근로복지공단의 산재불승인 판단을 바로잡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노동OK 이동철 상담실장)

<저작권자 ⓒ 중기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